엽편

제목아홉수2026-01-04 07:22
작성자 Level 10

B가 사라졌다. “나도 B의 친구라고는 너밖에 모르는데, 네가 모른다니까 어디 연락해 볼 곳이 없구나” “회사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볼 참이었다. B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고 있니?” “제가 연락해서 물어볼게요.” B가 사라졌다. 9살이 사라진다면 심각한 실종이고, 19살이 사라진다면 가출이고, 29살이 사라진다면 청춘의 마지막 방황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39살, 빤한 직장인이 갑자기 증발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9살 만큼 심각한 실종일수도, 19살이나 29살보다 심각한 방황일 수도 있다. 혹은 자살이나 사고, 피살 등을 상상할 수 있겠지만, 사고를 제외하면 모두 B와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무리한 사업을 벌이지도 않았고, 빚 독촉을 받고 있지도 않았으며, 원한 관계가 있지도 않았다. 대충 회사구나 싶은 곳을 다니고 있었고, 누구나 갚고 있는 수준의 대출금을 갚고, 부모에게 가끔 얼마쯤 보내는 삶일 뿐이었다. “별일이야 있겠어요? 혹시 경찰에는 연락을 해보셨나요?” “글쎄다, 이게 경찰에 연락해야 하는 일인지 확신이 안서는구나” “그래도 사람이 없어졌으니 일단 연락은 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휴대폰 추적 같은 걸 할 수 도 있지 않을까요?” “일단 좀 더 기다려 봐야겠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겼겠니?” 걱정은 되지만 사건이 본격적으로 삶으로 침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방어적인 자세, 부모지만 그 가족의 이러한 태도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겹지인이 없어 수소문 할 곳도 없다. B에게 다른 지인도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아는 지인은 없다. 언젠가 들은 B의 직장이름을 검색해서 연락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 중이라는 답변외의 의외로 의미있는 답변이 나왔다. 며칠 전 퇴사의사를 밝혀서, 회사에서 곤혹스러워하며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붙잡은 적이 있다고 한다. 퇴사라, 그것도 B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퇴직금 운운하면서 은근히 나를 통해 B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아마 B가 나를 통해 회사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B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평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걸 꺼리던 친구가 아니었다. 물건을 두고 가거나, 가져와야 할 물건이 있을 때 알려준 비밀번호가 아직 대화목록에 남아 있었다. B는 향유하는 취미도 취향도 없었다. 그래서 집은 공허하고 깔끔했다. 책상위에는 업무용 랩탑과 마우스만 반듯이 놓여있었다. B의 SNS를 탐색했다. 최근 집중적으로 ‘좋아요’를 누른 계정이 있었다. 계정을 따라 들어갔다. B도 그 계정에 거의 모든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러놓았다. 메시지를 보냈다. ‘B의 친구입니다. B가 며칠째 실종이 되었습니다. 가족도, 회사에서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시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옆에서 본 B는 운이 없었다. 흔한 불행의 클리셰들 일수도 있지만, B에게는 그 일들이 늘 최악의 타이밍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B를 가졌을 때. B의 아버지는 별안간 책임감같은 것을 느꼈는지 누군가의 말을 듣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B가 태어나기 한달 전에 사업이 아니라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힘들게 가정을 지탱하던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은 B가 9살 때 부터였다. B의 첫 아홉수였다. 술에 취해 엄마를 때리는 아빠에게 9살 어린아이가 달려들었도 아버지는 그런 아이를 밀어버렸다. 아이가 넘어지면서 소주병이 깨졌다. B은 왼팔에 장애를 입었다. “사는데 큰 지장은 없는데 뭐, 그보다는 그 이후로 아버지에게 한번도 덤비지 못했다는게 좀 분해, 몇 년 정도 참았다가 덤볐으면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B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팔에 생긴 일이나, 불우한 어린시절보다는 자신의 첫 도전이 좌절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부터 뭔가 과감한 생각을 하려하면 팔이 아프단 말이야, 심지어 처음 섹스를 할 때도 팔이 아프더라니까?” “할 때마다?” “아니 처음에만, 그래서 그 애 위로 고꾸라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엉망이었지” 과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B의 첫사랑은 길지 않았다. 후유증이 길었지. B가 19살이 되던 해였다. 그의 두 번째 아홉수였다. 대학에 입학하자 B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한 자취를 했다. 사실 자취를 할 필요도 없는 거리였고 집에서도 반대를 했다는데, 반대고 뭐고 간에 말도 안하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한 달 월세 겨우 들고 고시원에 들어가더니, 그 다음해에는 집보다 더 높은 원룸으로 들어갔다. 생활비와 월세를 벌기 위해 휴학을 모조리 끌어다 쓴 바람에 남들보다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활동을 할 즈음에 B의 어머니가 쓰러졌다. B는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29살 이었다. 세 번째 아홉수, “취업을 하면 온전한 한 명 분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생각이 없어지더라, 취직을 한다 해도 삶이 어떻게 진행될 지 전부다 한번에 알겠더라고, 난 이집에 얼마 되지 않눈 돈을 갖다 부으면서 살거야, 그러니까 머릿속에 가고 싶었던 회사 목록이 모두 사라지더라니까, 자소서를 쓰는 내내 왼쪽 팔이 아팠는데, 그 집에 들어가니까 팔이 하나도 안 아프더라니까.” 실제로 B는 아주 작은 회사에, 그것도 아주 늦게 취업을 했다. 취직을 축하한답시고 만났을 때는 사실 어느 곳에도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냥 게임처럼 GAME OVER 라는 글자가 뜨고 깔끔하게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과연 그 말엔 나도 꽤 공감했다.   ‘저도 B씨와 연락이 되지 않네요.“ 그 계정에서 답변이 왔다.‘혹시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저를 왜 만나려고 하시죠?’ ‘혹시 서로 단서가 될 만한 걸 알고 있을까 싶어서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좀 더 뭘 알아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경찰이나 가족분은요?’ ‘가족분과는 연락을 하긴 했는데, 저는 그냥 혼자 찾아보는 중입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궁금하던 차였는데, 한번 뵙는 것도 좋겠네요.’ Y는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은 사람이었다. 내성적으로 보였지만 상대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빤히 마주 보아서 오히려 내가 눈을 피하고 싶었다. 눈을 피하자, 빈티지원피스 아래 화려한 양말, 그리고 방어적인 느낌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틴더에서 만났어요.” 어떻게 만났냐고 묻자 생각지고 못한 답이 나왔다. B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틴더같은걸 사용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Y같은 사람도 틴더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또 놀라왔다. “안지는 오래 되었나요?” “음 한 달 정도 됐을 거에요. 썸이 좀 길었죠. 기색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좀 실망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실종일 줄은 몰랐네요.” ...... ‘혹시 식사 하셨어요?’ Y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그 날 나는 Y와 잤다. 섹스를 끝낸 후 그녀가 담배를 피워물었다. 놀라지 않은 척 한 개비만 달라고 했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준 후 새 담배에 불을 불였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에 골이 띵했다. 나는 끝까지 B와도 잤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어쩐지 왼팔이 아픈 기분이었다.   모텔 밖으로 나오니 겨울 햇볕이 쨍했다. 밥을 먹겠느냐 물었지만 Y는 그냥 가겠다고 말하고 성큼성큼 나를 두고 걸어갔다. 사실 나도 입맛은 없었다. 볕은 쨍했지만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걸었다. 문득 B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 밤 내내 잊고 있었다. B의 네 번째 아홉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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