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윤세민

제목202502242025-07-06 02:43
작성자 Level 10

군인에서 무속인이라니,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와 인생이 그렇게도 살아지는 구나.’ 였다. 소장 전역했서 무속인이라니, 그런데 무속인이 되는 데는 자기소개서 같은게 필요할까?

자기소개서를 써야한다. 직장이 필요하다. 40살에 자기소개서를 고민한다니, 예정해놨던 인생이랄게 없기도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사실 작년에 이미 써놓긴 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가 필요했기에, 취업사이트에 써놓은 게 있긴 하다. 지금봐서는 결코 취업생각이 없는 인간이 쓴 자기소개서 같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꽤나 머리를 쥐어싸매고 쓴거다. 정말이지 도대체가

쓸 말이 없다.

대학교 3학년이었나 아마 철학교양 수업이었을 텐데, 한 시간강사가 수업에 들어와서 히죽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자기소개서 쓰셨나요? 전 자기소개서를 한번도 안써봐서…’ 깜짝 놀랐다. ‘아 세상엔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있구나!’ ‘취업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긴 때였고, 자기소개서를 한 달에 한번씩 고쳐써야한다는 말이 취준생들 사이에서 잠언처럼 떠돌때였다. 그런데 세상엔 자소서를 쓰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는 인간이 존재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부터 자소서를 쓰지 않고 먹고사는 인간들을 혐오했다.)

20대 후반에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저는 이러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귀사의 도움이 될 인재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라는 문장을 쓰는 일 자체였다. 문학을 공부하는 청년들의 경우엔 ‘나는 쓰레기입니다.’ 라고 말하는게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본인이 왜 쓰레기인지 설명하라면 면접위원들의 눈에서 눈물을 뺄 자신은 있어도, 본인이 얼마나 잘났느냐고 설명하라면 갑자기 어버버하며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온사인 아래 쓰레기 사이를 거닐며 성욕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스스로를 조각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제가 역겹다 하였고, 저는 섹스 한번만 해준다면 모든 걸 잊고 떠나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위의 문장이나 쓸 줄 알았지 ‘저는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귀사에서 꿈을 펼치고 싶습니다!’ 같은 문장은 쓰지 못했다. 그러나 무려 2년 동안 밥을 친구한테 얻어먹다 보니 사람도 변해서 31살 쯤에는 ‘유쾌한 책벌레’ 라는 제목을 가진, 실로 오그라드는 자소서를 쓰는데 성공했다. (방금 전에 찾아내서 한번 읽어봤다.) 자소서의 마지막은 자랑스럽게도 ‘전 누구보다 귀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라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였다. 지금 읽어도 믿을 수 없다. 이런 문장을 쓸 줄 알았다니.

당시에 자소서는 나에 대한 3가지 장점을 요약해 놓았는데, 1. 끈기와 집중력, 2. 커뮤니케이션 능력, 3. 다양한 사회경험 이었다. 음.. 놀라울 정도로 지금 나한테 없는 것들이다. 저때도 저런 능력이 있어서 쓴 건 아닐거다 아마.

아무튼, 자기소개서를 써야한다. 머리를 쥐어짜도 두 문단 이외에 쓸 말이 없다. 대학 전공을 말할 나이도 아닌 것 같고, 해온 일을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건 두 줄이면 끝나고, 남의 자소서는 잘 만져주면서 정작 내 자소서는 6줄 이상을 나아가질 못한다. 차리리 인스타 아이디만 띡 던져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까.. 열심히는 살았는데…

자소서만 문제가 아니다. 구직을 함에 있어서 내게 목표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러닝 일은 그래도 포트폴리오를 꾸릴 정도의 외주 경력은 있지만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게다가 나이도 너무 많다. 그렇다고 다른 일에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메달리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나한테 소중한 건 내 일상이지, 내 일이나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인의 회사목록을 멍하니 볼 수 밖에 없다. 뭘 해야 행복하지? 성격상 내가 대충해도 남들보다는 열심히 하긴 하는데, 뭘 열심히 하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사춘기 마냥 둘 중 하나도 없다. 큰일이다.

와중에 일상은 견고하다. 즐겁고, 아늑하고, 견고하다.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든다. 다행이다. 이 반석이 무너지기 전에 뭔가를 해내야 한다. 10년 전엔 신촌장로교회에서 매주 했던 기도를 지금은 의왕의 경기중앙교회에서 매주 하고 있다. ‘저에게 예비하신 길에 대해서 좀만 알려주세요. 불안해 죽겠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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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에서 무속인이라니,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와 인생이 그렇게도 살아지는 구나.’ 였다. 소장 전역했서 무속인이라니, 그런데 무속인이 되는 데는 자기소개서 같은게 필요할까?

    자기소개서를 써야한다. 직장이 필요하다. 40살에 자기소개서를 고민한다니, 예정해놨던 인생이랄게 없기도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사실 작년에 이미 써놓긴 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가 필요했기에, 취업사이트에 써놓은 게 있긴 하다. 지금봐서는 결코 취업생각이 없는 인간이 쓴 자기소개서 같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꽤나 머리를 쥐어싸매고 쓴거다. 정말이지 도대체가

    쓸 말이 없다.

    대학교 3학년이었나 아마 철학교양 수업이었을 텐데, 한 시간강사가 수업에 들어와서 히죽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자기소개서 쓰셨나요? 전 자기소개서를 한번도 안써봐서…’ 깜짝 놀랐다. ‘아 세상엔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있구나!’ ‘취업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긴 때였고, 자기소개서를 한 달에 한번씩 고쳐써야한다는 말이 취준생들 사이에서 잠언처럼 떠돌때였다. 그런데 세상엔 자소서를 쓰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는 인간이 존재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부터 자소서를 쓰지 않고 먹고사는 인간들을 혐오했다.)

    20대 후반에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저는 이러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귀사의 도움이 될 인재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라는 문장을 쓰는 일 자체였다. 문학을 공부하는 청년들의 경우엔 ‘나는 쓰레기입니다.’ 라고 말하는게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본인이 왜 쓰레기인지 설명하라면 면접위원들의 눈에서 눈물을 뺄 자신은 있어도, 본인이 얼마나 잘났느냐고 설명하라면 갑자기 어버버하며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온사인 아래 쓰레기 사이를 거닐며 성욕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스스로를 조각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제가 역겹다 하였고, 저는 섹스 한번만 해준다면 모든 걸 잊고 떠나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위의 문장이나 쓸 줄 알았지 ‘저는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귀사에서 꿈을 펼치고 싶습니다!’ 같은 문장은 쓰지 못했다. 그러나 무려 2년 동안 밥을 친구한테 얻어먹다 보니 사람도 변해서 31살 쯤에는 ‘유쾌한 책벌레’ 라는 제목을 가진, 실로 오그라드는 자소서를 쓰는데 성공했다. (방금 전에 찾아내서 한번 읽어봤다.) 자소서의 마지막은 자랑스럽게도 ‘전 누구보다 귀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라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였다. 지금 읽어도 믿을 수 없다. 이런 문장을 쓸 줄 알았다니.

    당시에 자소서는 나에 대한 3가지 장점을 요약해 놓았는데, 1. 끈기와 집중력, 2. 커뮤니케이션 능력, 3. 다양한 사회경험 이었다. 음.. 놀라울 정도로 지금 나한테 없는 것들이다. 저때도 저런 능력이 있어서 쓴 건 아닐거다 아마.

    아무튼, 자기소개서를 써야한다. 머리를 쥐어짜도 두 문단 이외에 쓸 말이 없다. 대학 전공을 말할 나이도 아닌 것 같고, 해온 일을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건 두 줄이면 끝나고, 남의 자소서는 잘 만져주면서 정작 내 자소서는 6줄 이상을 나아가질 못한다. 차리리 인스타 아이디만 띡 던져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까.. 열심히는 살았는데…

    자소서만 문제가 아니다. 구직을 함에 있어서 내게 목표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러닝 일은 그래도 포트폴리오를 꾸릴 정도의 외주 경력은 있지만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게다가 나이도 너무 많다. 그렇다고 다른 일에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메달리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나한테 소중한 건 내 일상이지, 내 일이나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인의 회사목록을 멍하니 볼 수 밖에 없다. 뭘 해야 행복하지? 성격상 내가 대충해도 남들보다는 열심히 하긴 하는데, 뭘 열심히 하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사춘기 마냥 둘 중 하나도 없다. 큰일이다.

    와중에 일상은 견고하다. 즐겁고, 아늑하고, 견고하다.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든다. 다행이다. 이 반석이 무너지기 전에 뭔가를 해내야 한다. 10년 전엔 신촌장로교회에서 매주 했던 기도를 지금은 의왕의 경기중앙교회에서 매주 하고 있다. ‘저에게 예비하신 길에 대해서 좀만 알려주세요. 불안해 죽겠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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