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부터 21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난 하루 종일 공백의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은 취업이니, 대학이니 길을 찾아갔지만 둘 중 어느 길도 선택하지 않은 난, 성남에 오롯이 앉아 있었다. 아마 그땐 지방으로 취업간 친구가 일주일에 한번 돌아오는 날이나, 혹은 가끔 성남에 놀러오는 친구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면서 살았던 거 같다.
남들은 가장 바쁘고, 가장 다이나믹한 시절에 홀로 가장 권태로운 시절을 보냈다. 실제로 권태로웠냐면 그럴리가 없다. 하루 하루가 죄책감, 의무감, 자기 혐오, 텅빈 다짐, 자괴, 혐오로 전쟁같은 하루였다. 시간이 비면 불안해 하는 버릇은 그때 생긴 것 같다.
그래서 과연 늘 그렇듯 바쁜 연휴를 보냈다. 연휴기간 동안 통통 보내오는 외주와 수정을 몇 개 쳐냈고,죄송한 후회와 의무감으로 부모님을 만났고, 또 빈시간에 모처럼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아마 지금쯤 부모님은 결국 끝까지 돈을 안보낸 자식에게 서운해 하고 있을 터이다.
외주 수정을 하다가 잠시 화딱지가 났다. 역시 이 일을 계속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하겠다고 100번도 넘게 생각했던 일이고, 그 말은 곧 100번도 넘게 다시 일을 받았단 말이다. 지금도 새로운 외주처에서 아주 헐값에 일을 받았는데, 하면서도 너무 헐값이라 하면서도 화딱지가 난다. 그래서 사실 작업를 하다가 때려치고 이걸 쓰고 있다. 내일 보내야 하는데.
PM은 열정에 넘쳐 프로토를 삐까뻔쩍하게 만들었고, 갑사는 프로토를 보고 눈이 높아졌고, 개발자는 이 가격에 이 정도까지 개발해주면 안된다고 반대했겠고, 그러면 뭐 어떡해 대표는 외주비를 깎아서 한번 던져보라고 했겠지, 그걸 받으면 안되는데, 나야 어차피 안하면 그냥 놀 거 같고, 내가 이 업계에 책임감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고민하다 그냥 받았다. (이전에 너무 싸가지 없는 헐값을 내치고 손가락을 빤 탓도 있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가 고민인데, 나는 정말이지 내가 40대에 이 고민을 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20대에 늘 40대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이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서인데, 이럴수가! 40대가 되어서 무경력에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평화롭고 다사다난했던 연휴기간에 연인은 중요한 일을 몇 개 해냈고, 나는 이력서 사진을 찍었다. 이것도 큰일이라면 나름 큰일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쓰고 돌려야 하는데 그건 또 안해서 사실 의미가 없다.
외주 수정을 하다가 문득 구직 사이트를 들어가 봤다. 당연히 지옥이 펼쳐져 있다. 20대에서 늘 생각했다. 시대의 전형이 문학의 궁극적인 의무라면, 가장 문학적인 공간은 바로 구직사이트라고,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읽어 낼 수 없는 갖가지 언어들이 갖가지 함의로 사정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구직사이트를 둘러 볼 때면, 냉장고를 바라보는 박민규같은 심정이 된다. 내가 20대 때는 공무원 경쟁률이 사상 최고를 찍던 때였는데, 그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많은 이들이 구직사이트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해보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정글에 뛰어드느니 시험을 보는 게 차라리 낫잖아.
올해! 음력으로 올해! 84년 생의 삼재가 끝난다고 한다. 사실 평생을 삼재같은 건 안믿었고, 사주나 삼재같은걸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는데, 재작년 쯤 처음으로 이 미신에 기댔다. 왜긴 왜야 너무 힘들어서지, 그래서 삼재때문이라고 믿고 싶고, 삼재가 지나면 나아질거라고 믿고 싶은 거지,
평생을 유물론자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몇 년 전에 뭐 꿈에서 본 로또번호 같은 말씀을 하시길래 왜 저러시나.. 했는데, 내가 똑같이 그 꼴이다.
그래서 뭐 입추부터 84년생들은 대운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올해 입추부터 아주! 심상찮았다. 나쁜 쪽으로! 결론적으로 다 해결은 됐는데, 뭘 프린트 하려다 안되고, 어딜 가려다 길을 잘못 들고, 계단을 오르려다 다치고 등등 심상찮게 운이 안좋은 일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너무 춥기도 했고. 운전을 하면서 이 일들을 곱씹다가, 음 이것도 잘되려고 그러는 거겠지라고 생각해 버렸다.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지금 잘거다. 일을 하면서 마신 술이 너무 과하기도 했고, 새벽이 되니까 일하면서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너무 많이 침범한다. 경험상, 이 쓸데없는 생각들이 다 맞긴 했는데, 이걸 믿지 않는 편이 내 삶엔 이득이었다. 지금이 4시니까 네 시간쯤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을 해야겠다. https://www.instagram.com/p/DFqXV6VTQW1ROx7zcmX4JeD-JJILKeaKM2l4xw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