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카드값 계산을 해봤더니 파산상태였다. 그냥 파산이 아니라 당장 대출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도대체 카드 어플엔 어디에 썼는지도 모를 (사실 안다.) 수많은 금액이 찍혀있었고, 은행 어플엔 도대체 어디갔는지 모를 (이건 모르겠다.) 작은 금액이 찍혀있었다.
카카오 비상금 대출을 알아보고, 단톡방에 하소연을 했더니 루고가 30만 원을 빌려줬다. 이런 고마운 친구가 있나!!! 그래도 대출만 받으면 수입 계획으로 어떻게 매꿔질 거 같긴 한데, 문제는 내가 앞으로 돈을 안쓰는거지... 근데, 다음주엔 후쿠오카 여행이 예정되어있다. 최저가로 다녀오리라.
‘이제 앞으로 뭐하나’ 싶어서 혼자 할 일들을 좀 만들어 놨는데, 걱정이나 계획이 무색하게 매일 약속이 있었고 매일 이벤트가 있었다. 책도 사놓고, 읽을 책들도 좀 옮겨놓았는데 어째 한글자도 읽지 못했다.
키보드 수리도 맡겼고, 운동도 등록했고, 운동도 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이 잡혔고 이벤트가 잡혔고, 하루도 빠짐없이 폭식을 했다. 화요일엔 맛있는 와인을 마셨다.
이제 남은 삶에서 바쁜 약속 같은건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웬걸, 그동안 어찌저찌 살아낸 시간들을 보상받는 거 같은 꿈같은 시간들이 바쁘게 흘러갔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난주에 산 위스키가 1주일 만에 빈병이 되었다는 것과, 그 꿈같은 시간들 마다 모두 내가 너무 못생겼다는 거였다. 그래서 목표했던 예수님 스타일을 포기하고 목요일에 머리를 냅다 잘랐다. 매직과 펌을 거친 머리를 잘라내고 나니 꽤 깔끔한 머리가 되었고, 거지존을 통과해온 스킬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래도 머리 손질을 쉬이 할 수 있을 거 같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난 40 평생 내 머리카락을 이긴 적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앞으론 템과 돈을 쓰겠어!
키보드 수리를 맡긴 곳에서 매일 매일 연락이 온다. 키보드 수리 사진과 경과, 그리고 앞으로 수리 방향에 대해서 굳이 매일 매일 설명해 주는데, 수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수리과정을 말해주면서 왠지 신이 난 것 같아서 연락을 받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다. 공임비는 다 지불할 테니 확실하게만 고쳐달라고 말해놓았다.
스케줄표를 슬적 적어보았는데 앞으로도 약속이 숨가쁘게 있다. 무료한 것이 무서워서 몇 달전부터 잡아놓은 약속도 있고, 심지어 병원 예약과 여행이 겹쳐서 예약도 미뤄야 하고, 만나자고 연락 온 동생에게 당분간은 너무 약속이 많다고 오만한 답변도 해야 한다. 의외의 일들이다.
오랫동안 하루에 한가지 일 밖에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앞으로는 그러면 안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개인적인 일을 충분히 챙겨야 스스로가 만족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주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요즘 인스타에 긴 글 써서 올리는 거 사실 너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너무 못쓰고 유아적인 글들이라고, 그런데 그렇게라도 써서 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억지로 써서 올리고 있다고 말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동안 그렇게 쿨한 척, 있는 척, 침묵했는데, 그랬던 인간이 사실 아무것도 없는 텅텅 빈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는데도 모두 응원해주었다.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그 침묵이 고마웠다. 그것도 배려지 뭐) 가장 큰 문제는 살찌고 못생겼다는 건데, 후자는 어찌 못해도 전자는 어떻게 할 수 있으니 그만 좀 쳐먹어야 겠다. (후쿠오카 여행 제외)
오 그러고 보니 월요일에 골라놓은 옷을 싹 가져다가 기부했다. 이것도 몇 년을 벼르던 일인데, 30분 만에 처리했다. 그리고 방금 전엔 손님이 오면 까려고 한 와인을 까버렸다. 으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