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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김만석씨 일가 탈북사건 (1987)2025-07-13 02:35
작성자 Level 10

어릴 때 좋아서 반복해서 읽었던 책 중에서 ‘광호의 일기’라는 책이 있었다. 북한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한 초등학생 ‘김광호’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적은 일기로, 초등학생의 일상과, 당시 북한의 처절한 삶과 남한의 풍요로운 삶을 비교하며 적절하게 국뽕이 녹아 있는 책이었다. 책은 1988년도에 출간되었고, 내가 책을 읽었던 시기는 9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와서 내용을 되짚어보면, 사실 당시 내 또래 였던 광호의 생활이 내 생활과 비슷하진 않았다. 고길동의 저택처럼 한국의 전형이라고 보이는 삶은 사실 서민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었다. 책 속의 광호는 서울의 아파트에 살았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수영장에 자주 놀러갔으며, 주말마다 나들이를 다녔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등학생 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길동의 저택이 한국인의 평균적인 집이고, 광호의 생활이 한국 초등학생의 평균적인 생활이라는 관념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누구도 오각형 우윳곽 모양의 집에 살지 않으면서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오각형의 우윳곽을 그리는 것 처럼, 그런 관념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생각할수록 참 속편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 당시 광호의 생활은 왜 그렇게 이상적이었을까? 어른이 되어 문득 어릴 때 본 그 책이 생각이 나서 광호의 일기와 관련된 기록을 뒤져보았다. 


광호의 아버지 김만철씨는 북한의 상류층이었다. 의대교수였으며, 아버지의 항일활동을 인정받아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엘리트였다. 그러나 소련으로 유학을 간 막내 동생이 현지에서 동료들에게 북한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 문제였다. 막내동생은 다시 북한으로 강제송환되어 총살을 당하고 김만철씨는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의대교수 자리도 빼앗기고 의사의 직함도 빼앗긴다. 이일을 계기로 김만철씨가는 탈북계획을 세운다. 그게 1975년 이었다.


김만철씨의 계획은 12년 동안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직접 배를 모는 기술과 배를 수리하는 기술 등을 익힌 것이다 탈취할 배를 물색하고, 배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탈출경로를 구체화하는 등의 작업을 가족 몰래 이어나갔다. 그리고 1987년 1월 15일 일가 11명을 데리고 청진호를 탈취하여 동해로 항해를 시작한다. 처음의 목적지는 필리핀,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무려 브라질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따듯한 남쪽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배의 엔진이 고장났고, 동해를 표류하다가 1월 20일 일본에 도착한다. 


그런데 같은 날인 15일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백령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동진호의 선원 12명이 납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북한에서는 남한으로의 송환 의사를 밝혔으나. 김만철씨의 탈북사실을 알고 나서 송환을 거부했다. 이들은 영영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과 이들 가족의 입장에서는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원망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삶은 지독한 우연으로 같은 날 뒤바뀌었다. 


김만철씨의 가족은 제 3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이때 일본에서 통역으로 보낸 사람은 조총련계 사람이었다. 당연히 한국으로 가면 모두 죽는다고 이야기하였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길 설득했다. 북한 적십자에서는 일본에 공식적으로 송환을 요구했다.


한편 청와대에서는 김만철씨 일가는 반드시 한국으로 데려오라는 특명이 떨어진다. 일가의 목숨건 탈출이 체제 경쟁의 우위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던 것을 물론이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알려진 1987년 1월 20일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6일 뒤였다. 68세 노인부터 11살의 어린이까지 일가족의 탈북사건은 고문치사를 덮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일본의 입장은 북한과 남한, 그리고 제 3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하는 김만철씨 일가 사이에 끼어서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남한-일본-북한의 물밑 삼각 외교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당시 남한측 사람을 만나서 은밀한 작전을 제안했다. 일본 정부에서 김만철씨 일가를 남한과 가까운 공해상으로 추방 시킬테니, 그때 남한의 배가 재빨리 그 배를 인수하는 작전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공식으로 어느 나라에도 송환시키지 않고 추방을 시킨 형태이니 북한에 그래도 면을 차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본의 변심으로 갑자기 백지로 돌아간다. 문제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일본 국민이었다. 당시 83년 민홍규 하사의 탈북을 도운 혐의로 4년째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후지산마루호의 선원 2명이 있었는데, 북한에서 이들을 볼모로 일본에 압박을 넣었다는 것이 당시의 추측이었다. 


그 사이 우리 정부는 대만과 협상을 해, 김만철 씨 일가는 일단 대만으로 이주시키는데 성공한다. 남하에서는 여전히 남한행을 꺼리는 김만철씨는 설득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는데 이때 파견된 대표단이 김신조와 미그기 탈북자 이웅평이었다. 


결국 김만철씨는 설득 끝에 남한행을 선택, 일가족 11명이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청와대와 미디어의 의도된 주목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 미디어의 의도 중 하나가 당시 kbs 라디오에서 방송되었던 ‘광호의 일기’와 내가 읽었던 책일 것이다. 


이후 김만철씨 일가의 행적은 가끔씩 기사로 전해지고 있다. 자식들은 다행히 남한생활에 잘 적응했으나, 김만철씨는 종교단체에 여러번 사기를 당하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다. 2000년에는 김만철씨의 딸과, 동진호의 어로장이었던 최종석씨의 딸이 만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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