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제목연필2025-07-01 11:3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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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은 넓었지만 맨 뒤에는 쓰지않는 캐비닛 등이 쌓여있어 책상이 3개밖에 없었다. 그 세자리 중 두자리는 거의 고정석이었는데 늘 가장 일찍오는 A와 B가 가운데 한칸을 띄워놓고 앉았다. A가 오면 늘 B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연필로 무언가를 서걱서걱 쓰고 있었다. ’노트보다 태블릿과 랩탑이 많은 시대에 연필이라니…‘ A에게는 그 모습과 서걱거리는 소리가 썩 눈에 들어왔다. 요즘 연필이 고급취미라고는 하던데, B의 다른 필기구를 보아선 그렇게 고급스러운 취미를 향유하는 것 같진 않았다. 처음엔 별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곧 A의 귀에는 강의시간 내내 연필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꽂히기 시작했다. B는 강의를 듣는건지 마는건지, 강의시간 내내 뭘 서걱거리며 쓰고 있었고, 심지어는 쉬는 시간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뭔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동그랗게 등을 말고 쉼없이 서걱서걱 무언가를 쓰는 모습은 차라리 형벌에 가까워보였다. 그게 B의 형벌인지는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A는 왜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건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시간 내내 서걱거리는 소리는 A의 귀를 괴롭혔고, 한번 들리기 시작한 소리는 결코 귓바퀴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쉬는시간까지 계속되는 소리에 A는 쉬는시간마다 강의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B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A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드디어 서걱거리는 연필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오히려 심각해졌다. 이제는 강의시간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서걱서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시도때도 없이 A의 귀에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초침소리와 싱크대 물 떨어지는 소리를 뚫고 옆방에서 무언가를 맹렬히 쓰는 듯한 연필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선 신경쇠약이라며 약을 다소 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어떤 약을 먹어도 서걱서걱 소리만 들리면 정신이 갈수록 또렷해졌다.


어느날 밤, 연필소리에 괴로워 하던 A는 갑자기 일어나 서랍을 뒤져 오래된 연필을 찾아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아무 종이를 꺼내놓고는, ‘제발 그만 좀 적어대!’ 라고 적었다. 그때 잠깐, A의 귀에서 연필소리가 멈췄다.


그때부터 A는 강의실 맨 뒤에서 맹렬하게 연필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강의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공강시간에 아무 곳에서나 연필을 들고 노트를 펼쳐놓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서걱거리는 연필소리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큰 난관은 매 순간 쓸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의시간에는 교수의 모든 말을, 평소에는 떠오르는 아무말이나 써댔지만 곧 아무 생각도 바닥을 드러냈다. 단지 소리를 내기 위해 아무렇게나 연필을 휘갈기면 귀에는 으례 다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에서 들리는 소리는 분명히 글을 쓰는 리듬이었고, 그와 같은 리듬이어야만 소리를 멈출 수 있었다. 이윽고 A는 이어폰을 꽂기 시작했다. 노래는 너무 느려 라디오나 오디오북 등을 들으며 옮겨적었다.


자신에 대한 음흉한 소문에 대해서는 A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음흉하거나 음란한 소문이었다. A는 곧 사람이 없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기숙사 뒤편에서 아주 오래된 창고를 발견했다. 외진 곳 치고는 볕도 잘 들어오고 창문도 큰 창고였다. 예전에 쓰던 책상 등을 모아놓은 창고인듯 했다. 물티슈를 꺼내 책상을 하나 닦아보았다. ‘민중해방’, ‘민족통일’, ‘민주쟁취’ 등의 낙서가 책상이 쓰이던 시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퍽 흥미로운 감정을 느끼며 물티슈의 영역을 넓혀가던 A는 갑자기 그자리에 박힌 못 처럼 얼어붙었다. 책상 한 귀퉁이에 이렇게 써 있었다.


제발 연필 그만 서걱거려!!’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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