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이다. 좀 바빴다.
지난 번 게시물을 쓰고는 진짜로 제출할 자기소개서를 썼다. 낮에는 집중이 안됐고, 밤에 우울한 기분으로 쓰기는 싫어서 강남까지 차를 끌고 가 사람이 많은 24시간 커피숍에 앉아서 썼다. 의욕적으로 두어 회사에 자소서를 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공기업의 기간제 계약직 채용공고도 봤다. 공무원이니 공기업이니 공채니 하는 쪽과는 워낙 인연이 없다보니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무슨 관광지가 될 만한 골목을 발굴하는 계약직이라길래 흥미가 생겨서 자세히 살펴봤다. 지원 날짜가 오늘까지였다. 지원 과정을 살펴봤는데, 정해진 문항들이 있어서 이미 써 놓은 자기소개서를 활용하지는 못하고 전부 새로 써야 했다. ‘에이 하루 남았으니까 나도 이런 거 지원이나 해보지 뭐’ 라는 생각에 별 기대도 안하고, 문항들을 채워서 지원해 버렸다.
그리고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세어보니 벌써 제주도는 벌써 일곱번째다. 여러모로 의미가 깊고 반가운 섬이다. 십 수년 전에 슬로우라이프 열풍이 불면서 한바탕 한달살이나 관광열기가 지나간 후라서 모습이 다소 변하긴 했다. 처음 왔을 땐 젠트리피케이션 이전의 홍대를 섬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소 쇠락한 관광지 느낌이 났다. 처음 왔을 때 방문했던 소담한 가게들은 거진 없어지거나 주인이 바뀌어있었다. 욕심을 버린 슬로우 라이프를 찾아 왔던 주인들은 아마 거액의 권리금을 받아들고 다시 서울로 떠났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탁트인 시야와, 낮은 돌담, 여전히 낮은 키의 식물들과 바다가 보이는 골목은 여전해서 유감은 없었다. 왜 그런지 난 제주도의 돌담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숙소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 지원했던 공기업에서 문자가 와있었다. 서류합격자 발표가 났으니 ‘누리집’에 들어가서 확인하라는 문자였다.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문장 맨 뒤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내 수험번호가 걸려있었다. 허 참. 이게 무슨 일이람.. 의욕적으로 지원했던 다른 회사들에선 연락이 없었다.
돌아와서 바로 면접 준비를 했다. 주변 형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공사의 최근 사업들이나 내가 지원한 분야의 자세한 사업 내용과 예산까지 외웠다. 예상 질문을 정리하고 답변도 적고 손글씨로 다시 배껴쓰며 달달 외웠다. 그리고 자기 전에 정장을 입어보았는데, 턱도 없이 작았다.
30대 초반에 맞춘 정장이니 당연했다. 어쨌든 정장을 안입을 순 없으니 몸에 끼워넣어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20대에 샀던 면접용 넥타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넥타이 안 맬 순 없으니 옷방을 뒤져서 작년에 알리에서 산 넥타이를 맸다. 귀여운 여우가 그려진 넥타이다. 좀 위트있는 코디를 하고 싶어서 산 넥타이였다. (윌시코기인줄 알고 샀는데 받아보니 여우였다.) 이거 말고는 해골그림이나 공룡이 그려진 넥타이 밖에 없어서, 그나마 여우가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다.
여기에 지원을 했던 이유중 하나는 집에서 가까워서다. 버스로 두정거장, 자전거나 스쿠터로도 간편하게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다. 물론 면접땐 차를 끌고 갔다. 같이 면접을 보는 경쟁자들은 날 포함해 4명이었는데 다 나보다 열살 이상은 어려보였다. 뭐 그럴거라 예상은 했는데, 그들이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는 좀 궁금했다. 아마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겠지 뭐,
면접 땐 꽤 잘한 것 같다. 예상질문은 하나도 안나왔지만 그래도 예상답변을 적으면서 공부했던 자료들이 도움이 되었다. 다만 너무 화성행궁 얘길 많이 한 게 좀 마음에 걸렸는데, 뭐 처음부터 끝까지 DMZ얘기만 하는 지원자도 있어서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았다. 돌아와서 면접용 넥타이를 사고 몸에 맞는 사이즈의 마이를 주문했다. 합격을 하든 안하든 입을 일이 있을 것이다.
면접이 끝나고는 좀 홀가분하면서 뒤숭숭한 기분에 서울로 나가 산책을 했다. 연인과도 시간을 보내고, 서울 거리를 쏘다니면서 이틀을 보내고 성남으로 갔다.
베스파가 하나 생겼다. 아는 형한테 ‘아주 긴 할부’로 사기로 했다. 그러려고 산 건 아니지만, 합격한다면 이걸로 출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명의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차량 등록 사업소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60쯤 먹은 아저씨가 날 낚아 채더니 뭐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 이륜차 명의 이전 때문에 왔다고 하니까 침을 잔뜩 묻혀서 서류를 챙겨주면서 좀 무례하게 굴었다. 가슴을 보니 행정사 협회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만원이면 다 대행해 준다고 하면서 좀 공격적으로 굴길래 아. 네, 하면서 모른 척했다. 원래 무례한 걸 워낙 싫어하기도 하고 무례한 사람들한테는 더 무례하게 대하는 버릇이 있어서 옆에서 덤비는 걸 그냥 귓등으로 넘기며 보란 듯이 서류를 직접 작성했다. 사실 서류도 다 준비해가서 신청서 하나만 쓰면 될 일이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공무원이 한참 처리를 하는 동안 등록사업소를 한번 쉬 둘러보니 같은 행정사 목걸이를 한 사람이 대여섯명이 더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말을 건 60줄의 아저씨는 제일 젊은 축이었고, 80이 넘어보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사정은 몰라도 저 양반들도 나이를 먹고 일하겠다고 나와있는 건데 너무 매정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만원 그냥 주고 맡길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삶은 참 다양하고, 생존의 현장에서는 늘 겸허해진다. 슬쩍 검색해보니까 등록사업소에 상주하는 행정사들 때문에 민원도 있는 모양이던데, 공무원들 입장에서도 행정사가 나서면 본인들도 일이 수월해져 악어와 악어새같은 공생관계인듯 했다.
이전은 빠꾸없이 완료되었고, 다시 베스파의 원래 주인 형한테 돌아가서 담소를 나누다가 공사의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사실 지난 이틀 간 1시간에 한 번 씩 공사의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떨어졌다. 내 구직의 역사를 보면 별일도 아닌데 괜히 맥이 탁, 하고 풀렸다. 왠지 붙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합격자는 관광경영학과를 나온 취준생이었고, 2위와 3위는 짧은 사회경험을 한 20후반 30초반 쯤의 지원자였다. (3위의 지원자는 정장에 흰 운동화를 신고 왔다.) 공교롭게도 순위는 내가 짐작한 나이의 역순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형이 ‘아무래도 나이 때문 아닐까?’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이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다행일리는 없지만,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차라리 나이가 많아서 떨어진 게 좀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늙은 행정사 분들이 떠올랐다. 삶은 참 다양하고 아이러니하다.
기운이 빠져서 형한테 바로 가야겠다고 하고 집으로 내뺐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 추리소설 오디오북을 틀어놓고는 듣다가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는 또 잠들기 전 부분을 다시 찾아 들었다, 그렇게 약 10시간 동안 추리소설만 들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어쩐지 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후의 취업활동도 접고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 약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이 나이에는 진짜로 취업이 안되는 건 아닐까? 벌써 지인에게 돈도 빌렸고, 이번달부턴 카드값 독촉도 받고 있다. 이번 달 안에 취업이 되지 않으면 구직보다는 일용직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별수없다. 걱정이나 위기감도 필요하긴 하겠다만, 아무래도 구직에는 그보다는 낙관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잘 되겠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실 무슨 일을 하게 되든간에 내가 나로서 있기만 하면 그만이다. 정체성을 직업에 맡기지 말아야지. 근데 스쿠터를 어디다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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