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 피살사건
누아르라는 장르의 시초는 1940년대 쯤으로 짐작한다. 누아르라는 용어는 1946년 프랑스의 한 평론가에 의해 탄생되었지만 장르의 전성기는 장르가 정의되지 않았던 1940년 초반이었다. 문학 장르로서의 누아르와 영화 장르로서의 필름 누아르는 거의 동시대에 탄생하였으며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공생을 위한 장르적 특징을 키웠다. 누아르라는 용어가 널리쓰리기 시작 한건 1970년대 부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냉전이라는 상황은 권력층에 대한 불신과 사회에 대한 냉소를 만들어 냈다. 이야기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소문을 듣고 자란다. 그리하여 필름 누아르는 1970년대에 다시한번 전성기를 맞이 한다.
미국의 한 학자는 이 장르의 특성을 ‘돈의 부식성, 존재의 무의미함과 부조리, 남성성과 공적 삶의 관료화에 대한 불안, 그로테스크에 대한 매혹, 그리고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대한 유혹과 거부” 의 나열로 정의했다. 장르는 필연적으로 여성을 희생시켰다. 여성은 말 그대로 희생되거나, 혹은 악녀로 묘사됨으로써 남성의 폭력성을 강조하였다.
1970년 3월 17일, 서울 마포구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한 여자가 사망했다. 여자는 당시 고급 승용차였던 도요타 코로나 조수석에 타고 있었고, 사인은 총상이었다. 1970년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여인의 오빠는 범행을 자백했다. 동생의 문란한 성생활을 질책했지만 동생이 폭언으로 대응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동생을 살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빠는 살해도구였던 권총을 내놓지 못했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던 1970년, 미국과는 달랐다. 한국에서 총이 가리키는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다.
사망한 정인숙은 고급 요정의 호스티스였다. 당시 서울의 3대 요정이라 불리던 곳은 대원각, 삼청각, 그리고 선운각이었다. 특히 선운각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내연녀 장정이가 운영하던 곳으로 실질적으로 김재규의 소유였다. 정인숙은 바로 그 선운각의 호스티스였다.
현장에서는 정인숙의 수첩이 발견되었다. 이 수첩에는 당시 재벌들의 이름,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이후락 주일대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주요인사 27명과 권력실세 수십명의 이름, 그리고 박정희의 이름까지 적혀있었다. 정인숙에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아버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첩에 적힌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소문이 파다 했다. 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이 되었다.
경찰은 오빠의 자백을 받고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정인숙에겐 근거리에서 총격을 맞았을 때 남아 있어야 할 화약흔이 없었지만, 오빠의 소매 끝에서 화약흔이 나왔기에 이를 경찰은 이를 자백의 증거로 봤다. 그러나 범행에 사용된 총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의 발표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사건은 소문만 남기고 사라졌다. 89년 범인이었던 오빠 정종욱은 출소 한 뒤, 자신은 장인숙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위층이 정인숙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이려 했다. 고위층이 뒤를 봐줄테니 자신의 한 범행이라고 자백라는 협받을 받았다는 등의 주장을 했지만 그 고위층이 누군지는 밝히지 못했다. 그는 범인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에 있던 아들 정성일은 1990년에 돌아와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내었다. 그러나 소송 중에 정일권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2009년 배우 장자연이 사망했을 때, 몇몇 언론들이 그녀의 이름을 되네었다. 장르가 바뀌었지만 희생 구조는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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