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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필리버스터 (2016)2025-07-14 13:42
작성자 Level 10

식민, 해방, 전쟁, 신탁, 분단, 초대 대통령, 부정선거, 독재, 그리고 독재, 민주화. 

바로 위에 거대한 영토의 일당독재국가가 있고, 또 바로 아래엔 견고한 일당체제를 갖고 있는 경제 대국이 있는 걸 감안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사이에서 아이러니한 오정반합을 반복해왔다. 

천안문 광장에 피가 씻기고, 전공투는 컵라면을 남기고 사그러들었지만 한국에서는 무려 두 번이나 시민 혁명이 성공해 버렸다. 승리의 기억은 곧 효능감이 되었고,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인들은 누구보다 치열해야했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려면 먼저 국회의원의 법안을 발의한다. 그러면 소관상임위에서 해당 법안을 1차로 심의하고, 법사위에서 한 번 더 법안을 심의하고 두 번의 심사를 통과한 법안은 본회의로 올라간다. 과반수 이상이 출석한 본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면 법안은 대통령에게 간다. 대통령은 법안을 거부할 수 있으며 대통령이 법안을 거부하면 해당 법안은 다시 국회로 돌아와 이번엔 국회의원 ⅔ 의 찬성을 요구한다. 만일 국회의원 ⅔ 이상이 찬성하면 법률이 확정된다. 


하지만 이 엄격한 과정에 예외가 있다. ‘직권상정’이다. 법안 소관 상임위와, 법사위의 심사를 건너뛰어 국회의장의 직권으로 바로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즉 과반이상의 의석수와 국회의장만 동의한다면 어떤 법안이든 소수당이 의견을 낼 기회를 박탈하고 바로 확정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 바로 날치기통과다. 과반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은 직권 상정을 통해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소수당이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의장석 점거, 등 물리적 충돌밖에 없었다. 우리가 과거에 봤던 국회 내 몸싸움이 바로 이 장면들이었다. 보수 언론들은 국회 내 몸싸움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도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수당에서도 역시 이 물리적 출동을 피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썼다. 비정규직 법을 통과시킬 때는 크리스마스 새벽에 몰래 국회문을 열고 들어와서 법안을 통과시키고, 미디어법을 통과시킬 때는 의원들을 몸으로 막고 대리투표까지 해서 법을 통과시켰다. 한미 FTA비준안동의안 처리 때는 국회에서 최루탄이 터지기도 했다.(통합진보당 김선동) 이토록 다양한 물리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때 직권상정으로 통과된 법은 무려 99건 이었다. 


직권상정의 지나침 남용, 그에 따른 국회내에서의 물리적 충돌이 반복되자 이를 막기 위해 만든 법이 국회선진화법이다. 법의 내용은 간단하다. 문제의 ‘직권상정’의 요건을 강화시켰다. 이전에 정해진 직권상정은 국회의정이 정해놓은 시간까지 상임위 심사가 마무리 되지 않으면 의장이 법안을 본회의로 가져 올 수 있다, 즉 소수당의 반대가 심한 쟁점법안의 경우 다수당과 국회의장이 맘만 맞으면 언제든 직권상정으로 법안을 국회에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 선진화법에서는 직권상정의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그리고 각 교섭단체 의원이 합의하는 경우로 제한했다. 즉 다수당과 국회의장의 맘이 맞는다고 맘대로 법안을 직권상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국회 내에 최루탄을 터트린 김선동의원의 유죄가 확정되면서 FTA비준동의안이 무리없이 통과되고, 김선동의원의 의원직이 상실되는 등 여론도 좋지 않았기에, 국회내의 물리적 충돌은 이후로 사라졌다. 늙은이들이 가끔 요즘 국회는 재미가 없는 농담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신 의원의 60%가 동의해야 하는 패스트트랙이 생기면서,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의석수는 150석에서 180석이 되었다. 180석이라니, 대통령이 탄핵당하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의석수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던 법이 바로 국회선진화법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무지 대통령과 집권당이 맘대로 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천재지변’이나 ‘국가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직권 상정이 가능했다. 그럼 ‘국가비상사태’를 누가 정의 하느냐? 법에는 정확히 정의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강력히 요구할때 정의화 국회의장은 그 때가 국가비상사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으로 본회의에 올렸다. 당시 새누리당의 의석수는 157석이었다. 


테러방지법은 쉽게 이야기하면 국가가 국민 개인의 카카오톡이나 이메일, SNS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법이었다. 이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 도 있겠다만,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던 정권이다. 아버지는 각종 반공사건으로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수없이 뺏은 독재자다. 즉 테러를 방지하기 위함이 아닌,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의 개인적인 기록을 아무렇지 않게 열람하고 제지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되는 쪽이 더 강했다. 


민주당의 정의당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필리버스터였다. 무제한 토론으로 국회를 마비시켜 법안을 통과를 막는 방법이었다. 편법처럼 보이지만 국회법에서 엄연히 보장하고 있는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행위이다. 


그래서 2016년 2월 23일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기록을 맘대로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에 민감한 이들은 독재를 살아오고 87년을 경험한 민주화 세대보다는 오히려 젊은 세대들이었다. 그들은 기업이 약속한 보안아래서 각종 취미와 취향을 마음껏 즐겼고, 그것이 정치 성향이든 성적 취향이든 간에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이가 맘대로 볼 수 있다는 세상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국회의원이 뭘 하는 직업인지도 정확히 몰랐던 세대들에게 법안 통과를 막기위한 차력쇼라는 것은 정치 효능감을 발생시키는 거대한 이벤트가 되었다. 국회 방청객이 꽉꽉 들어찼으며 국회 본회의 누적 시청자수가 몇백만을 기록했다. 첫 주자로 나선 김광진 의원의 5시간 34분, 이어 은수미 의원의 10시간 18분의 기록 등등 국회의원 들의 차력쇼가 이어졌다 이것이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테러방지법이 뭐길래,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거길래? 등등의 당연한 질문이 10대, 20대 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필리버스터는 192시간 25분 동안 이어져 세계 최장기록을 세웠고, 이종걸 원내대표는 무려 12시간 31분을 발언했다. (1인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은 미국의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의 24시간 18분이다) 


결과적으로 테러방지법은 통과가 되었고, 현재 시행중이다. 그러나 당시의 필리버스터는 10대와 20대에게 정치 효능감을 심어준 거대한 이벤트가 되었고, 이후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속화했다. 또한 이후 새누리당과 그 후신들은 단 한번도 다수당이 되어본 적이 없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책상을 내려치며 분노했다고 하고, 언론에서 필리버스터를 깎아내리기 위해 각종 저급한 기사들을 양산했다. 그러나 트위터(당시 주류였다.)를 비롯한 다양한 시민들의 여론은 언론과 유리되어 독자적인 미디어를 공유했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시민들에게 정치효능감을 심어준 거대한 이벤트로서는 거대한 성공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민주당은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번의 필리버스터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새누리당과 그 후신 정당의 필리버스터였다.  


  이미지 2025. 7. 14. 오후 10.38.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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