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다. 책상 옆에 놔 두었던 짐을 주섬 챙겼다. 의도치 않게 사무실에 놓인 발랄한 색상의 야자수 그림이 민망해하고 있었다. 원래 바닷가에서 펼쳐 놓을 짐이었다. 오늘은 휴가였다. 여름 휴가를 준다고 생색은 있는 대로 내더니, 정작 휴가를 쓸 틈을 안주었다. 이것만 하고, 이건 마무리하고, 이것만 가르쳐 주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온 국민이 움직이는 극성수기에 겨우 사흘 휴가를 얻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전화가 왔다. ‘일이 생겼다. 가는 길에 들러서 이것만 해주고 가라,’ ‘일행이 있다.’ ‘차 시간이 있다.’ ‘도착하면 저녁이다.’ 등등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접어 넣었다. 그런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무슨 이유라도 대고 회사로 가지 않는다면 괴로운 시간이 3시간에서 3개월로 늘어날 거다. 부장은 그런 인간이다. 어떻게든 누구라도 이겨 먹어야 하는 인간.
다시 지하철 역으로 돌아왔다. 선글라스는 가방 깊숙히 집어 넣은지 오래다 그냥 집으로 갈지, 일행이 먼저 출발해 있는 여행지로 갈지 고민이 앞섰다. 1박 2일 여행, 지금 가서 저녁에 도착한다면, 술이나 마신 다음 할 일은 그냥 돌아오는 것 뿐이다. 고민 끝에 서울을 선택했다. 한 낮, 지하철에서 야자수 그림이 여전히 민망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평일 한 낮의 지하철, 인구밀도 말고도 출퇴근 길과는 다른 점이 많다. 다양한 연령대, 풍부한 표정, 다양한 옷차림, 사람이 꽉꽉 들어찬 지하철이 콘크리트 기둥처럼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헐거운 풍경으로도 세상이 지켜지고 있었나, 어쩐지 어제까지의 내가 콘크리트 기둥속에 숨겨진 시체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 모레면 다시 콘크리트 기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기둥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내 삶은 그래야만 지탱되니까, 별 수 없다.
우울을 생각을 떨치려고 다시금 지하철을 휘 둘러봤다. 다양한 캐릭터, 노약자석에는 나름의 영역이 전개되어 있고, 맞은 편에 앉은 아주머니는 왜인지 아까부터 자꾸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휴대폰 게임에 빠져있는 학생들이나,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허공을 보는 젊은이, 드물다고는 하지만 종이책을 펼쳐놓고 보는 사람도 있다. 주말의 지하철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마침 지하철이 한강 위를 지나고 있었고, 공간이 열리면서 뜨거운 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기력한 풍경에 볕은 생을 강요했다. 이유모를 죄책감에 강을 보려고 눈을 돌리자 내 옆에 부르스 윌리스가 뜨거운 볕을 받으며 한강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 부르스 윌리스는 머리카락도 하나도 없고, 치매로 고생하고 있다는데, 저기 서있는 백인은 M탈모가 심하지만 그래도 아직 머리카락이 있고 무엇보다 젊다. 정확히는 부르스 윌리스가 아니라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다. 아니 닮은 백인이라 쳐도 꼬질한 와이셔츠와 경찰 수첩 목걸이까지 차고 있는건 뭐람? 코스프레인가? 코스프레 라고 해도 지하철에서 까지 맨발일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리고 와이셔츠는 다이하드 3고, 맨발은 1인데 컨셉이 안맞잖아. 매니아가 저런걸 틀려도 되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지하철의 평온한 분위기가 요상하게 느껴졌다. 맞아 원래 평일 한낮의 지하철은 이렇게 평온한 곳이 아니었다. 잡상인과 전화통화, 노약자석의 고성이 들리는 곳이었지, 일본 영화의 한 풍경처럼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제서야. 이 지하철 칸의 모든 이들이 저 백인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왜 누구도 문제제기를 안하지? 라고 생각을 해봤자, 일단 나부터도 할 수가 없었다. 옷이 좀 더러운 백인이 지하철에 탔다고 문제제기를 할 수도 없고, ‘혹시 존 맥클레인 형사입니까?’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그런 공식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반바지에 하와이안 셔츠는 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지하철은 지하철이니까 안에 누가 있던 말건, 열차는 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낮술에 거나하게 취한 늙은 남자가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난동이었다. 노약자 석이 비어있음에도 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일어나라고 시비를 걸고는 여학생이 자리를 피하자 눕듯이 앉고는 큰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브루스 윌리스를 의식하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휴대폰 속으로 시선을 파 묻었다.
난동이 점점 심해졌다. 늙은 남자는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주로 여성)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부르스 윌리스와 난동 사이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과연 존재감이란 무엇인지, 왠지 서울의 지하철에 부르스 윌리스가 있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야이 씨발새끼야”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누구보다 내가 놀랐다. 그러나 내 행동을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성큼성큼 늙은 남자에게 다가갔고 다가가면서 계속 고함을 질렀다.
“나이 쳐먹고 개새끼가 지하철에서 염병하고 자빠졌네. 술 쳐먹었음 조용히 자빠져 자던가 어디가서 뒈지던가왜 여기서 지랄이야 씨발새끼가”
그제서야 분노가 느껴졌다. 분노에 대한 인식보다 행동이 빨랐고, 뒤늦게 내가 터졌다는게 인지되었다. 반바지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소리치며 다가오자, 늙은 남자는 움찔 놀랐다. 그러나 곧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반응했다.
“뭐 이 젊은 새끼가 어따ㄷ….”
까지만 들렸다. 나는 그 남자를 발로 차 버렸고, 파운딩을 하고 가차 없이 얼굴을 가격하고 있었다. 분노와 짜증이 배설하듯 쏟아졌고, 폭행은 절정 직전의 자위행위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낚아챘다. 불쑥 몸이 들리더리 번쩍하고 턱에 타격이 들어왔다. 부르스 윌리스였다. 그는 나를 제지하고 구타하고 다시 제지했다. 지하철에서 나는 그와 뒹굴며 몸싸움을 했다. 과연 맥클레인 형사의 파워도 굉장했지만, 생전 처음 싸워보는 나도 생각보다는 상대가 되었다. 어쩐지 내 공격에 그가 과하게 반응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철이 또 역으로 들어서고 문이 열렸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열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이 튕겨져 나오자 타려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열차를 안탈 수는 없기에, 모두 열차에 올라탔다. 맥클레인은 의기양양하게 열차 안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이피 카이 예이, 머더퍼커’
실제로 그렇게 말한 쪽은 그가 아니고 나였다. 플랫폼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대로 플랫폼에 누워있었다. 어쩐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더 누워있다가 누가 올까봐 얼른 일어나 집으로 갔다.
휴가가 끝났다, 한 일이 없는 휴가였다. 가장 좋았던 순간이라면 아침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순간, 그 1분 밖에 없었다. 경찰에서 연락이 올까 조마조마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회사 입장에서는 휴가를 보내줬으니까 이제 출근을 요구할 차례다. 이번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다시 콘크리트 기둥이 되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우르르 물결 마냥 인파에 휩쓸려 플랫폼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플랫폼에 그가 있었다. 맥클레인 형사였다.
내가 그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플랫폼 저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이번엔 젊은 남자였다. 밤새 술을 먹고 귀가하는 길이었는지 역시 만취해 있었고, 출근이 바쁜 직장인 사이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순간 맥클레인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니가 가도 되는 일이잖아?’ 라는 표정을 해 보였고, 그는 ‘아니야 이번에도 니가 가야해’ 라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나는 왜인지 그 이유를 이해했다.
요전의 늙은 남자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남성 몇몇이 그를 제지하려고 몰려들었다. 나는 가방을 내던지고 그 남자들을 제치며 달려갔다.
“야 이 개새끼야!”
힐끗 뒤를 보자 맥클레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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