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제목202507182025-07-18 06:38
작성자 Level 10

#엽편

“어떻게 지냈어요?”

“여기저기서 이것저것하고 지냈지요.”

“하긴 나도 그래요. 고생했어요.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하느라고”

이십대 때 잠깐 만났던 사람이다. 당시 그녀는 상처를 안고 방황하고 있었고, 자신을 버리기 위해 선택한 상대가 나였다.

나는 스스로 확대시켜 놓은 상처때문에 비대해진 지의식을 어쩌지 못해 휘두르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나는 ‘어차피 그 상처 누구도 이해 못해요.’ 라고 대답하고는 바로 ‘오늘 나랑 잘래요?’ 라고 물었다. “응”이라는 대답에 체온이 올라갔던 그 느낌이 아직 기억났다.

“어때요? 늙어서 보니까”

“그대로라서 다행이네요. 여전히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그래요? M씨는 어쩐지 초연한 사람 같아요.”

“어느 정도는요”

같이 웃었다.

“옛날에 우리 만났을 때, 나 좋아했어요?”

“네, 좋아했죠. M씨는 아니었어요?

”좋아했어요. 그래서 당황스러웠어요. 아무나 만나고 싶었는데 좋은 사람이 나와버려서, 사실 그날 누가 나와도 그냥 그 사람이랑 잘 생각이었거든요.”

“서운하네요. 나는 나한테 반해서 잔 줄 알았는데”

“반했었어요. 그 날,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마지막에 만날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이제 나타난 거에요?”

“맞아요”

10여년 전 처럼 ‘나랑 잘래요?’ 같은 물음은 필요 없었다. 그냥 손을 잡았고, 거절하지 않았고, 모텔로 향했고, 10여년 전과 똑같이 늘 하나 남았다는 디럭스 룸을 이번엔 고민없이 달라 했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말한마디 없이 섹스를 했다. 예전에 그녀는 어색한 척을 해야 했고, 나는 능숙한 척을 해야 했지만, 이번엔 둘 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탐닉의 성의만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그 때, 못한게 있었는데, 오늘 하려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땐 왜 못했어요?”

“나보다 깊은 상처가 당신에게 있는 것 같아 질투가 났어요.”

“오늘은요?”

“내가 더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왜요?”

“미안해요.”

성의있는 섹스를 끝내고 잠이 들었나 보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대 옆자리 빈 자리를 보고, ‘이렇게 또 사라지려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에도 그렇게 사라졌다.

강한 요의때문에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밖에서 예보하지 않았던 비가 오는 듯 했다.

비척비척 모텔의 욕실 문을 열었다. 거기에 그녀가 핑크빛 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핑크빛 수면은 심연으로 갈수록 깊고 붉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마지막으로 선택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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