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제목202407262025-07-01 14:17
작성자 Level 10

위스키를 좋아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되도록 내 취향을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아직 위스키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긴 라거를 좋아하던 그녀가 에일을 함께 즐기는데도 3년 쯤 걸렸던 거 같다.

나는 우울증 약을 먹고 난 이후로는 사정을 하지 못한다. 우울증 약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는 건, 몇 번의 좌절을 겪은 이후에나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 사정만 안되고 발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 즈음 우리에게 섹스는 사정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싱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소꿉놀이가 되었다. 성기에 집중할 필요가 사라졌고, 서로의 육체, 상대의 반응, 농담, 애정을 늘어놓고,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나는 섹스를 하며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고, 그녀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는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번은 그녀가 숨을 한껏 들이마셔 배를 움푹하게 만들어 배꼽 위에 위스키를 부었다. ‘빨아 마셔줘’ 그 한마디에 발기한 채로 직무유기 중인 성기가 터질 듯 뻐근해졌다.

위스키가 범벅이 된 얼굴을 들자 그녀는 꺄르르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보고 급하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사정을 하지도 못해 콘돔도 끼지 않은 섹스에 그녀도 오래 정상에 머물렀다. 음주 후 격한 운동으로 취기가 오를대로 오른 나는 사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서 표정을 구기며 그녀의 위로 무너졌다. 그녀는 나를 안아주며, ‘일주일만 약을 참고 다음 주에 진짜 섹스를 해보자, 그럼 섹스 생각에 우울증도 잠깐 없어지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해줬다.

과연 나는 일주일 동안 약을 안 먹었고, 수능 후 섹스를 약속받은 고등학생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엔 과연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같은 사정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종종 며칠 후의 섹스를 위해 며칠 동안 약을 참고, 그 며칠을 고등학생같은 심정으로 살게 되었다. ‘이래선 우울증이 아니지 않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은 그로부터 한 세달이 지난 후에 들게 되었고, 그때서야 렉사프로정을 끊을 수 있었다. 섹스는 결국 섹스여야 섹스였다.

그게 일년 전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떠났고 대신 렉사프로와 트라조돈이 다시 찾아왔다, 위스키는 떠난 적이 없다보니, 약과 위스키가 서로 뒤엉킨 밤이 매일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한번 보자는 그녀에게 나는 주말을 약속했고, 혹시 몰라 그 주 내내 약을 끊고, 섹스를 약속받은 재수생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일 년 만에 만난 그녀는 나에게 보험증서를 들이밀었다. 나는 뭔지도 모르는 보험 증서에 서명을 했고, 집으로 돌아와 수능을 망친 재수생같은 자위를 했다.


그리고 보험 가입은 우울증 때문에 부결되었다.

(2010년 쯤 여름에 성남에서 찍은 사진)


무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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