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제목202505122025-07-06 02:57
작성자 Level 10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다. 네 우울은 감성의 산물이라고 결코 우울을 포기하지 말고 소중하게 정제하라는 말, 나한테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는게 유감이고, 또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더 큰 유감인 말이었다. 내가 들었다면 나는 용기를 얻었을까? 아마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이게 좋은거라면 가끔 선택권 정도는 줬으면 좋겠다고. 우울을 정제하는 것 자체가 인생이라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겠냐고,

게다가,

20대였으면 동의할 만한 말이지만 지금은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로 성공한 사람들 중 우울의 괴물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어떤 직장인보다도 튼튼하고 무던한 멘탈의 소유자들 뿐이었다. 그들은 멘탈이 튼튼하기에 다른 이들이 가슴 깊이 찔러 넣는 감정을 자기 밖에서 다듬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안정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안정이라… 평생 바랬다. 든든한 지지체계를 갖고 싶었고, 안정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늘 그러고 싶었는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7년을 일한 직장에서도 어쩌면 나는 불안만 안고 관계를 꾸렸다. 고용안정을 느낀 적도 없었고, 친구들 앞에서 진짜 나를 드러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들으면 무슨 섭섭한 소리냐고 하겠고, 전 직장이 들으면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냐고 하겠다만, 사실 나도 진짜 나를 보여주면 탈락할까 겁나는 마음과 진짜 나를 은근히 들이미는 양가 감정 사이에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주간윤세민도 쓰는거고 이 지랄도 하는거다.

안정이라는 건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상대가 나를 봐준다는게 아닐까?

내가 나로써 이 관계 속에 있다는 안정, 내가 나로써 이 관계에 충분한 조건이라는 신뢰, 그게 ‘신뢰’가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관계를 믿지 않는다면 그런건 아니다. 프리첼 시절부터 글을 썼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어떻게든 내 본연의 모습으로 칭찬받고, 공개된 공간에서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내 이런 모습을 그 관계에 안착시켜 달라는 입사지원서였다. 관계의 신뢰가 간절하기에 나는 불안한 관계, 의심이 필요한 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매일, 매시 진심을 물어볼 수도 없고, 내게 거짓말을 하거나, 관계를 치장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안한 관계를 먼저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신도 아니고, 독심술사도 아니기에 평생 누굴 의심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학원에 취업한 날, 카톡 내게쓰기에 그렇게 썼다. ‘내가 나로서 있을수만 있으면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다.’ 내가 읽고 쓰는 사람으로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알바일 뿐이다. 능력이 없어 전업 작가는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다행히 좋은 시대에 태어나 문자를 알고, 책을 가질 수 있으니 이 정도 권리만 주어진다면 나는 나로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나로서 있게 하는 사람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게 중요한 사람이 내게주는 불신은 자연재해다. 나는 사람을 볼 줄 모르고, ‘보고싶다.’, ‘대화가 재밌다.’ 는 감정 하나만 따라가는 사람이다. 때문에 실수는 수도 없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난 빠짐없이 아파했다. 나한테 신뢰를 주지 않는 사람도, 멋대로 믿어 버린다.

그래서 관계가 끝난 후의 아픔은 오롯이 내 몫이다. 도무지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독특한 점은 그럼에도 상대가 종종 내게 미안함이나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한번은 왜냐고 물은 적이 있다. 네 책임이 아니라는데 왜 나한테 사과하느냐고, 그러자 맥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 같은 사람은 없었어.’

비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너 같은 사람은 많았어’ 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럴까? 이 부분에서 나는 조금 우스운 스탠스를 취한다. ‘그럴리가 없어’

우스운 이야기한 하나 더 하자면 나는 종종 내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경험인데, 그들 인생에 나같은 경험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못하는 영역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닌 영역이라도 사건은 발생하고 나를 찌른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닌 상처에 늘 같은 피를 흘린다.

나는 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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