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부족했다. 전날 전혀 잠을 자지 못하고, 해가 떠있는 내내 운전을 한 날이었다. 관절마다 피로가 쌓여있었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묘한 각성때문에 해가 져도 눕지 못했다. 오늘 만나자는 제안을 어떻게든 피해야 했던 컨디션이었지만 오늘 꼭 만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공기가 끈적였다. 낯선 사람은 의외로 금방 편안함을 찾았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왠지 안절부절 못했고 말을 찾는데 바빴다. 다행히 둘다 담배를 피워서 공백을 연기로 매울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간 안이 암시로 가득 찼고, 연기를 들이마셔 욕망을 삭였다. 팽팽하던 긴장이 예고없이 깨졌다. 오랜만에 격한 섹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섹스를 끝낸 후에도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사이로 앉아있는 둘에게는 아직도 약간의 긴장이 당겨져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일, 아니 오늘은 뭐해요?”
우주와 우주가 만나는 일은 늘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땐 언제나 버겁다. 나는 매번 그 일을 할 때마다 블랙홀처럼 우주 전체를 삼키길 원했다. 그런 주제에 목구멍은 작아서 늘 괴로워했다. 그래도 좋다고, 오늘이 좋다고, 미완의 질문을 줄줄이 달아놓고 웃었다.
문이 열린줄 알고 성큼성큼 들어가려 했다. 당연한 일인줄 알았다. 들어가서 내 식대로 물건을 정리 해놓고 나면 내 공간이 될 줄 알았다. 나는 늘 괜찮은 공간을 만들어 냈고, 아주 오랫동안 상대는 그 공간을 마음에 들어했다. 내가 공간을 잘 꾸며 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상대의 배려였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도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내 상처안에 상대를 집어 넣고 봉하려 했다. 상대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멋대로 삶을 정의하며, 우리의 상처와 행복이 상보적 관계라고 믿었다. 끈적한 공기속에서 그녀가 날 안을 때 집요하게 그녀의 상처를 안으려 했다.
상처를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은 어디서 왔을까? 내 문장으로 모든 삶을 정의하고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서푼짜리 문장으로 상처를 비집고 인생을 사려하는 뻔뻔한 진상이었다.
긴장과 고통을 구분하지 못할 쯤이 되었을 때, 어설픈 다짐, 서툰 단언, 익숙한 애원, 폭신한 입술, 슬픔도, 욕망도, 죄책감도, 사랑도, 한입에 삼키겠다는 욕심, 그 해 가을이 되었을 때쯤엔 이미 충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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