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부유한다.
실존은 가라앉고, 사상은 떠오르려 한다. 그 중층에서 생이 부유한다. 먼지에게 행선지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의미가 없다. 행선지가 있으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타인의 뒤척임만으로도 운명은 흔들린다.
다짐, 희망, 좌절, 낙관, 자의식, 혐오, 우월감, 원망, 자책을 쌈에 싸서 한 입에 넣는다. 여전히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탄수화물이 부족한 탓이다.
어릴 때 허락받은 볕의 양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창살에 잘린 불구이거나, 혹은 뿌연 먼지에 가려 산란된 볕의 일부였다. 그래도 당시엔 제한적이었기에 명료했던 그 볕을 만질 수 있었다. 지금은 더 많은 볕을 허락받았다. 얼굴 가득 볕을 받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예 볕에 몸을 묻을 수도 있다. 넘치는 햇살 안에서 나는 한 결의 빛줄기도 만지지 못한다. 볕보다 명료한 것은 자괴감이었다.
일상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상이 지켜진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방점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럼 일상의 방점은 무엇일까? 이따금 입금되는 돈이기도 하고, 드물게 올리는 인스타 게시물이기도 하고, 혹은 유난히 상념에 빠지는 밤이기도 하겠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방점은 섹스가 아니겠는가.
섹스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많은 것을 규정한다. 길어봤자. 1시간도 채 현현하지 못한 주제에 이전과 이후를 아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타인의 섹스가 내 운명을 몰아가기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식욕과 다를 바가 없을텐데, (혼밥도 가능하잖아!)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알쏭달쏭 스마트 세상, 바쁘다 바뻐 현대사회는 내 결정권을 행사하기도 버겁다. 아침부터 나는 너무 많은 선택을 해야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또 선택권을 포기하는 선택도 해야 한다. 선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므로 또 그에 따른 사회적 체면도 챙겨야 한다. 그런데 왜 상처는 늘 내 결정권 밖에 있는 일에서 받게 될까? 아니 훌륭한 우리들은 함께 사회적으로 약속했잖아요. 상처받지 않기로,
생이 부유한다. 임차권과 순두부찌개, 환율과 키높이 깔창, 묘하게 큰 구두와 자꾸 흘러내리는 양말, 대출과 보일러실 사이에서 생이 부유한다. 여름은 영원하지 않지만 인류의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 겨울은 지나가지만 기억은 지나가지 않는다. 마침표를 찍어서 챕터를 넘겨보려 했지만 마침표가 캐쉬템이라서 자주 찍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모쪼록 모두에게 잘 부탁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살던 지하방은 딱 A4 용지만큼의 볕이 들어왔다. 볕은 방의 이쪽부터 저쪽까지 120도 정도의 궤도를 유람하고 사라졌다. 큰 방이 아니라서 누울 수 있는 포지션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유일한 포지션에 누워 잠을 자면, 아침 10시 20분 쯤에 볕이 얼굴을 때렸다.
묘한 술책이었다. 10시 20분은 쓸모가 없는 시간이다. 어딜가도 지각이고, 심지어 일요일 예배도 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10시 20분에 깨어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볕이 얼굴을 훑고 머리 위로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다시 잠드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10시 20분에 내 얼굴을 때려 나를 깨우는 볕의 역할은 내가 살아있다고 내게 알려주는 일 뿐이었다.
생이 멈추지 않는다. 끼니 걱정을 하면서 끼니를 먹는다. 저주받을 기상을 확신하며 잠에 들고, 관계의 연속성을 기대하며 사정한다. 평생 생을 어떻게 이어나갈까 걱정하지만 사실 생은 멈추지 않는다. 태어날 때 부터 정해진 것 같은 생은 사실은 콘돔 안에 현자타임을 넣어둔 다면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돈이 없다. 내일은 옷을 예쁘게 입을 것이다. 삶을 비관해 놓고, 사진을 찍으며 웃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현자인 척을 하고 ,자기 전에 자책을 할 예정이다. 맛있는 것을 먹을 예정이다. 이유도 모르면서 10번 이상 웃을 예정이다. 사랑하는 게 무엇이냐 물으면 지금이라 답할 거다. 그리고 모레 또 눈을 뜰 예정이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할 예정이다.
나는 수면이 산란한 빛을 보기 위해서 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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