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정말 많은 주간이었다. 한가로운 게 좀 싫어서 일을 좀 기꺼워하고, 찾아서 하다보니 정말로 일들이 몰려버렸다. 요즘 자주 만나는 친구가 여행을 가는 바람에 시간이 한참 비어서 그 기간에 일을 잔뜩 끼워넣었는데, 그 친구가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까지도 그 일들을 마저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일을 준 사람들이 내일 오전부터 ‘설계자님, 파일은 언제쯤 보내주실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볼 텐데, 4개 중에 하나만 해놓아서 매우 송구할 예정이다.
일이 많이 없거나 한가할 때는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일의 효율만 생각하고 의미나, 정체성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고민이라는 게 정말 별거 아니다.
애플워치를 잃어버렸다. 멀쩡히 잘 차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손목에서 사라졌다. 중간에 들른 곳은 식당 한 군데 밖에 없는데, 찾아가 봐도 없었다. 잘 쓰고 있긴 했지만 이왕 없어졌으니 그냥 없는 채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즘 스팸도 너무 많이 오고, 쓸모없는 정보값이 좀 많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근데 요즈음 아버지가 스마트워치를 하나 갖고 싶어하시는 눈치다.
침실에 빔을 설치했다. 비싼건 아니고 알리에서 3만원짜리 싸구려를 설치해서 침실에서 뒹굴거릴 용도로 샀다. 빔보다는 같이 주문한 침실용 테이블이 훨씬 비쌌다. 그 김에 침대에서 강식당을 보면서 피자를 먹다가 새로 빤 이불에 핫소스를 제대로 흘렸다. 색갈도 하얀 이불이라 꽤 그럴듯한 서사가 있는 이불이 되었다.
사실 지금도 이걸 쓸 때가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 요즘 커피를 볶거나 까페에서 커피를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는데, 커피를 볶고, 집에 와서 또 외주를 하고, 또 나가서 커피를 볶는 일만 반복한 한 주였다. 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보니 속에서 시끄러웠던 일들이 좀 가라앉아서 기분도 나름 괜찮았다. 그러고 보면 사실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걸 좋아한다. 문제는 살면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거지,
어젠 왠 우편물이 와서 열어보니 LH였다. 도무지 뭐라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요지는 돈 300을 12월 31일까지 내놓으라는 거였다. 아니 작년에 임대료가 올랐다면서 1년 동안 유예해 줬다는데, 작년에 재계약을 하면서 듣도보도 못한 소리다. 나뿐만 아니라 LH 사는 사람들한테 돈300을 내놓으라고 하면 덜컥 내놓을 사람이 어디있겠나, 난데없이 무슨 판결문처럼 돈내란 소리와 계좌만 떨렁 보내왔다. 조만간에 LH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그건 그거고 또 한편으로는 통장에 돈 300도 없다는 게 실감이 났다. 돈이라는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거라고, 지난달에 빚을 갚느라 목돈을 처분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유자금 돈 300도 없다니 이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덜컥 겁이 났다, 왜냐면 앞으로도 내 지출을 웃도는 수입은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민을 하다가 내년이 되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까지 고민했다. 사람이 참 가벼운게 통지서 하나 날라왔다고 정체성까지 고민하게 된다.
그 와중에 롤라이35가 사고 싶어서 한참을 찾아봤다. 어쩜 이렇게 월별로 갖고 싶은게 자꾸 생길까. 사실 몇년 전부터 갖고 싶었는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서 포기한 카메라다. 지금은 내가 포기했을 때 가겨보다 다시 2배가 뛰어있는데, 근데 이젠 그 가격을 지불하고도 갖고 싶어졌다. 더 오르기 전에 사야할텐데.. 사람이 참 가벼운 게, 장래와 노후까지 걱정하다가 사고 싶은게 생겼다고 금새 활기를 찾는가 하면, 또 그깟걸 가지지 못했다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농담과 좌절을 버무리다 보니 그럴듯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다. 심정적으로는 벌써 오래전에 콜드게임으로 진거 같은데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단다. 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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